<1114호> 6·25전쟁 후 70년, 새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다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20-07-01 (수) 10:47
6·25전쟁 후 70년, 

새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다 


6·25전쟁 당시 교회의 역할과 오늘날 교회의 역할


70년 전 한반도에 전쟁이 일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쟁으로 비화(飛火)돼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 간 교전이 이어졌다.

전쟁 발발 즈음의 재림교회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한국재림교회는 일제강점기를 뒤로하고 재건에 한창이었다. 당시 한국재림교회는 1949년 11월 13일 회기동 본부교회를 사용하던 조선합회신학교가 현 삼육대학교 부지에서 새로 문을 열었고, 면목리에 있던 삼육중학교도 새로운 부지로 이전해 초·중등교육과 대학 교육을 아우르는 종합교육의 장을 마련해 밝은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5월 24일엔 현 부지로 이전 후 처음으로 삼육초급대학 졸업식이 열렸다. 이때 13명이 졸업했다. 1945년 해방 후, 한국의 교육과정은 미국 교육과정에 맞추어 9월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는 학제로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실정에 맞춰 입학 시기를 봄으로 옮기기 위해 1년에 한 달 씩 앞당겨 시행하고 있었다. 1950학년도는 6월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됐다. 5월에 졸업식이 열린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전쟁 발발 하루 전인 6월 24일은 안식일이었다. 이날 서울위생병원교회에서는 성경통신학교 영문과정을 마친 65명의 졸업식이 거행됐다. 같은 날 강원도 강릉에서는 강릉교회 헌당식이 열려 배의덕 한국연합회장을 비롯한 여러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강릉에 머물고 있었다. 또 다른 지도자들이었던 류제한 박사, 정동심 목사, 박창욱 장로 등 세 사람은 그해 7월 10일부터 22일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릴 대총회 참석차 한국을 떠난 상태였다. 
강릉교회 헌당식에 참석한 일행은 헌당식을 마치고 그곳에서 하룻밤 묵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선교사들은 군인들을 태우고 거리를 달리는 군용차량의 소음에 잠에서 깼다. 거리에는 주민들에게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방송이 이동차량을 통해 전파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선교사들은 즉시 강릉에 있는 미군부대를 찾아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확인하고 황급히 서울로 돌아갔다.  
왕대아 시조사 편집국장은 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직원들과 함께 한글로 번역된 문장들을 영어 원문과 대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직원들이 일하다말고 잠깐 창밖을 내다봤을 때 피난 인파를 목격했다.
전쟁 직후 서울이 북한군의 통제에 들었을 때 서울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은 북한 정부의 특별 병원으로 지정됐다. 6월 28일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 중 일부가 중랑교를 지나 남하하려다 미 군용기의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서울위생병원은 교전이 있었던 중랑교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었던 까닭에 북한은 병원을 북한 고위 관료를 위한 전용 병원으로 지정했다. 

전쟁 중에 열린 총회
6·25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1952년 5월 19일 한국연합회 제16회 총회가 개최됐다. 성도들은 여전히 대전, 대구, 부산, 제주도 등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고 수도권 일대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진행 중이어서 서울에 들어가려면 도강증을 얻어야 하는 등 왕래가 불편했다. 따라서 총회는 서울이 아닌 충북 청주의 한 초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됐다. 
전시상황이었지만 2년마다 개최해야하는 총회가 6·25전쟁 때문에 이미 4년이란 시간이 경과했고, 그간의 선교 상황을 성도들에게 보고하고 전쟁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지방 도시에서라도 열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총회 보고에 따르면 1951년 말 한국재림교회엔 교역자 234명, 교회 26개소, 교인 2413명, 각급학교 14곳이 있었다.
1948년의 제15회 총회와 비교하면 교역자의 수와 교회 수, 교인 수 등에서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그 밖에도 서울위생병원은 부산과 제주 분원 설립으로 그 봉사 영역이 확대됐다. 6·25전쟁 중 새롭게 조직된 교회는 7개소인데 그 중 5개 교회가 평신도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이시화(Clinton Lee) 한국연합회장은 총회에서 ‘한국인들에게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자’, ‘세상의 표준보다 높은 우리의 교육방침을 지켜나가자’ 등의 사업방향을 제시했다.

6·25전쟁고아의 어머니 류은혜 여사
류은혜(Zilda Grace Rue) 여사는 류제한(George H. Rue) 삼육서울병원 제5,7대 병원장의 부인으로 간호학교장(현 삼육보건대학교) 및 병원 부설 고아원인 성육원 초대 원장으로 봉사하며 600여명의 전쟁고아들을 미국, 노르웨이, 호주, 스웨덴 등지로 입양시켜 ‘6·25전쟁 고아의 어머니’로 불린다. 
류 여사는 1947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후 1967년 7월 남편의 은퇴로 고국에 돌아갈 때까지 봉사를 쉬지 않았다. 그녀는 전시 상황에서 의료진의 부족으로 류 박사가 제주도에 머물면 류 여사는 서울에 머무는 식으로 홀로 환자를 돌봤다. 그녀는 불과 1.6㎞ 바깥에서 포탄이 터지고 사택도 파괴되고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의료시설도 없이 석탄불에 의료 기구를 살균 소독해가며 진료했다. 전쟁이 마친 후엔 성육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보기 시작했고, 이곳을 거쳐 간 전쟁고아만 1000명이 넘는다.

한국사회와 함께 호흡했던 기독교
한국만큼 기독교가 빠르게 부흥했던 국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말 그대로 한국 기독교의 성장은 폭발적이었다. 이정배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는 이러한 성장의 동력을 한국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설정한 선교 주제에 있다고 설명한다. 선교 130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의 기독교는 개화기엔 이 땅의 개화를 선교적 사명으로 여겼고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선 독립을 선교와 등치시켰다. 그리고 해방이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땐 전쟁고아를 비롯해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데 매진했다는 것이다. 
80년대 한국 기독교는 특히 개신교는 성장이 곧 선교였다. 국가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교세를 한껏 부풀리는 일에 사활을 걸었다. 그 결과 대형교회들이 탄생했으며 성장을 성숙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모습에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코로나19 사태에서 한국의 대형교회는 민폐만 끼치는 형국이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2015년 4월 세계적인 강연 프로그램 테드(TED)에서 ‘다음 발생은?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다(The next outbreak? We’re not ready)’란 제목으로 8분 30여초 동안 강연했다. 당시 강연에서 그는 “미래엔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전염성 높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2020년 인류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쟁을 펼치고 있다.
70년 전 일어난 전쟁에서 교회는 전쟁의 상흔을 치유했다. 그리고 오늘 인류가 바이러스와 벌이고 있는 이 전쟁에서 교회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과연 한국재림교회는 한국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가.

권태건 aux24@naver.com

   

 
주소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망우로 21길 18, 302호 / 전화: 02)960-0690 / 팩스:02)968-2293 / 이메일: 3004news@hanmail.net /등록번호: 204-29-34632 Copyright ⓒ 재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