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5호> 13. 질투하시는 하나님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9-02-28 (목) 15:35



13. 질투하시는 하나님


                   
                  - 차영석 / 부산서부교회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8:6,7)

사랑의 다면성
사랑은 그 본질은 같을 지라도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여러 다른 인간관계로 묘사된 하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 사랑을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시103:13;사63:16;눅15:11,32), 어머니(사49:15), 친구(요15:13~15;사41:8;약2:23), 혹은 남편(사54:5,6;렘31:32)으로 그리고 있다. 부성애나 모성애, 혹은 우정은 분명히 서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버지의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필요를 채우는 든든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어머니의 이미지를 통해 따뜻하고 포근한 하나님의 품을 연상한다. 친구는 힘들 때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대상이다. 친구의 이미지를 통해 사소한 문제조차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친근한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남편으로서 하나님은 어떤 의미의 사랑을 보여주는가? 흔히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 중 무조건적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를 하나님의 사랑, 곧 최고 고상한 사랑으로 꼽는다.  그리고 남녀간의 이성적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는 저급하고 열등한 사랑으로 취급 받는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과 우리를 부부 관계로 묘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는 에로스적 특징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녀 사이의 뜨거운 사랑을 솔직한 언어로 그려낸 아가서가 외설적이지 않은 것은 한 남자의 여인을 향한 절절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불 같은 사랑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아1:13~17;5:8). 다른 관계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배타적이며 열정적인 적극성을 오직 남녀 관계에서만 볼 수 있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 질투
둘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한다(출20:5). “질투하는”이란 히브리어는 같은 뿌리를 가진 세 단어의 어근이 된다: 소유(purchase or ownership), 열심(zeal), 질투(jealousy). 이 계명에서 질투한다는 말은 이 세 용어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특히 슥1:14엔 이 삼중 개념이 극대화돼 나타난다.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해 크게 질투하며”(Cry thou, saying, Thus saith the LORD of hosts; I am jealous for Jerusalem and for Zion with a great jealousy, KJV). 
질투는 사랑의 별명이다. 질투는 사랑의 대상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불같은 감정이다. 그래서 질투만큼 사랑의 강력함을 묘사할 수 있는 경험이나 언어는 없을 것이다. 아가서 기자는 사랑과 질투를 죽음과 음부에 비유했다. 이 세상 어떤 존재도 죽음의 힘을 이길 수가 없다(고전15:54). 하지만 질투는 이렇게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죽음보다도 한 차원 더 강하다. 그래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 
질투는 연인 관계에서 어떤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 있는 실존하거나 가상적인 위협에 대해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Salovey&Rodin,1989). 질투의 정도는 개인이 관계 속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가치에 비례한다(Berscheid&Fei,1977). 다시 말해, 질투는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대상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반응이다. 
심리학자 뷰크(Buunk,1997)는 질투를 반사(reactive jealousy), 소유(possessive), 불안정(anxious) 유형으로 구분한다. 반사적 질투는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친밀하거나 성적인 관계를 가질 때 반응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소유적인 질투는 파트너가 제 삼자와 친밀한 접촉을 하는 것을 차단하는 행위로 표현되며, 불안정한 질투는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잠재적 행동에 대해 집착이나 의심으로 특징지어진다. 질투는 그 유형에 따라 관계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유적인 질투나 불안한 질투는 부정적인 형태로 표출되기에 관계를 파괴하지만, 질투가 관계에 대한 헌신의 형태로 표현될 때는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들러(Nadler)와 도탄(Dotan)(1992)은 질투를 느끼는 여성이 더 만족스러운 관계를 경험한다고 보고 한다. 

정당한 질투와 잘못된 질투
일반적으로 질투나 시기는 하지 말아야 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정당한 질투와 잘못된 질투를 구분해야 한다. 감정 표현의 형태는 유사할 지라도 이 두 가지 질투는 그 대상과 이유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성경이 금하고 있는 죄 된 질투나 시기는 자신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대상이나 소유와 관련해서 일어난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꾼 꿈 이야기를 듣고 그를 질투했다(창37:11). 사도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해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치료하자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시기심이 일어 사도들을 옥에 가둔다 (행5:17, 18). 모세는 진영에 머물던 두 사람이 성령을 받고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모세를 위해 시기하는 한 소년을 꾸짖는다(민11:26). 
이렇듯 잘못된 질투는 어떤 대상이 정당하게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소유에 대해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이러한 질투는 뼈를 썩게 할 만큼 사람을 병들게 한다(잠14:30).
반면에 정당성을 인정받는 질투는 부부 사이와 같이 합법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남편의 사랑의 일부를 다른 여인이 취해 갔을 때 그 여인이나 남편에 대해서 질투심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잠6:34,35). 바로 이 감정은 원래 자신의 것을 되찾고자 하는 합법적인 반응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단의 그리스도를 향한 질투(사14:12~20;겔28:1~19)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질투(출34:14; 신32:16,21;민25:11;고전10:21,22;시78:58)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사탄의 질투는 그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사탄은 자신 보다 더 큰 영광과 지위를 가진 그리스도를 시기했다. 그리스도가 가진 영광과 소유는 원래부터 그리스도의 것이었다. 그 질투심 근저에는 비교의식과 탐욕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원래부터 정당한 자신의 소유였던 백성들의 마음을 다른 존재에게 빼앗겼을 때 불같이 질투하신다. 특히 하나님은 응당 자신의 것을 빼앗겼을 때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침해받은 것으로 여기신다(겔39:25;출34:14).  이 질투는 하나님으로 해금 빼앗겼던 당신의 소유를 되찾기 위해 행동을 취하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일을 행하실 때 불같이 일어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질투하신다. 우리의 최선을 아시지만 그 최선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의 질투심은 자극된다(슥1:14;8:2;사37:32;신6:24;욜2:18). 마치 성적이 낮은 아이의 부모가 성적인 좋은 아이를 부러워하듯이 하나님은 더 좋은 상황으로 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우리를 보며 질투의 감정으로 애를 태우신다. 

하나님을 향한 질투
질투와 열심이 같은 의미로 사용됐듯이 정당한 질투는 열심과 헌신의 정신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질투(열심)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얼마나 파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지 보아왔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위한 질투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사도 바울을 회심하기 전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바울은 이런 열심을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롬10:2). 
올바른 질투(열심)의 예를 살펴보자. 바알브올에서 상당수의 이스라엘 남자들이 행음에 가담했을 때 비느하스는 질투심이 불같이 일어나 가담자 중 한명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했다고 그의 질투를 평가했다(민25:11). 그의 질투는 하나님의 마음과 공감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질투였다(민25:13). 이스라엘 자손의 언약이 버림받고 하나님의 제단이 헐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 엘리야는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질투)이 유별”하다고 고백한다(왕상19:14). 그 질투로 나타난 열심이 엘리야로 해금 죽음을 무릅쓰고 만연한 우상숭배 관습에 대해 경고하게 했다. 

* 히브리어 ‘qanah’는 ‘질투하는’ 혹은 ‘열심
  있는’ 으로 번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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